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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그리고 기억, 후각 상실

문성실 | 2020년5월29일 | 조회수 3,199
시리즈 기사 연구자 스토리
연구자들의 실험실 안전 문제

편집 노트: 글은 저자의 블로그 실렸던 허락을 받고 재발행하였습니다. 글을 쓴 문성실 박사님은 현재 미국에서 바이러스 백신 연구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냄새나지 않아?”

남편은 냄새를 못 맡는 나와 함께 산지 10년이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런 질문을 나에게 던진다. 클로락스 티슈로 바닥을 닦고 둘째 아들을 출동시켰다. 마치 마약 탐지견이 마약 냄새를 맡듯이 둘째 아들에게 화장실 냄새를 맡으라고 들여보냈다.

“이제 괜찮은 거 같은데, 엄마는 냄새 못 맡지?”

“응, 엄마 냄새 못 맡아."

 

30대가 되기 전, 박사학위를 받는 게 목표였던 나는 내 나이 스물여덟에 박사학위와 후각을 맞바꾸었다.

내 청춘의 실험실은 그랬다.

1인용 라꾸라꾸 침대를 펴면 한 사람이 옆으로 간신히 지나갈만한 공간이 중간에 있고, 두 개의 인큐베이터와 한 개의 클린벤치와 두 명이 간신히 어깨를 붙이고 앉을만한 공간이 한쪽 벽면에 있었다. 반대편엔 빽빽하게 시약들이 들어 찬 시약장과 실험대와 개수대가 나란히 있었고, 입구 옆에는 작은 캐비닛과 형광 현미경을 볼 수 있는 작은 방이었다. 난 그곳에서 5년이란 내 청춘의 시간을 참 열심히 보냈다. 그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누가 뒤에서 날 쫓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월화수목금금금 참 힘차게 달렸다.

 

내 청춘의 실험실은 그랬다.

유리창의 작은 틈새로 봄이면 라일락 향이 실험실로 스멀스멀 흘러 들어오곤 했던 곳이었고, 자줏빛 자목련이 창가에 서리는 그런 곳이었다.

몇 번째 봄부터 라일락 향을 맡을 수 없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늘 톡 쏘듯이 느껴지던 아세트산의 냄새가 무뎌졌을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맛은 느낄 수 있었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그렇게 난 내 청춘의 실험실을 뒤로하고 미국 땅으로 향했다.

처음 연구소에 출근하던 날, 출입증을 받기 위해서 수십 가지의 교육을 받았다. 기본적인 실험실 안전교육 1,2,3을 받고 나서야 클리닉에 가서 혈액을 채취하고 서너 가지의 예방접종을 맞고서야 실험실에 출입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이 일주일이란 시간이 걸렸다.

 

12년이 지난 오늘, 12년 전 받았던 안전교육을 받았다. 사실, 매년 받는다. 아니, 매년 안전교육 항목이 늘어나고 있다. 올해부터 필수항목으로 들어간 안전교육이 시약 후드(Chemical Fume Hoods) 교육이다. 재작년엔 시약을 쏟았을 경우 대처방법에 대한 교육, 작년엔 생물안전캐비닛(Biosafety Cabinet)이 오염되었을 경우의 대처방법에 대한 교육이 필수항목으로 들어갔다. 몇 년 전에는 2-Mercaptoethanol이라는 젤을 굳게 만드는 시약을 단 10ul를 실험실에서 썼다가 실험실이 폐쇄된 적이 있었다. 특유의 냄새로 인해 누군가가 신고를 했고, 안전 담당관이 나와서 공기질 검사를 하고 매뉴얼을 들이밀고, 공기 순환이 되고 난 뒤에야 실험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문 3개를 열고 가야 하는 시약 후드로 간다.

지난 1년 간 20여 가지의 안전교육을 받았다는 서명을 한 서류를 제출하고 문득 내 청춘의 실험실의 라일락이 생각났다. 이맘 때쯤이었을 텐데… 내 몸보다 실험이 좋았던 그 당시 팔팔했던 내 청춘은 안전에 참 무지했었다. 각종 시약들과 바이러스, 세균이 내 청춘의 실험실을 가득 채웠었고, 소독을 위한 에탄올을 하루 수십 번씩 뿌려댔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땐 왜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았고, 학교나 실험실 내의 안전관리 규칙도 없었을까? 

아이를 낳고 나서 내 아이의 ‘아기 냄새’를 맡아본 적이 없다. 내 아이의 ‘태변 냄새’도 맡지 못했다. 냄새에 대해 배우는 아이에게 10여 년 전 ‘기억 속의 냄새’를 꺼내서 알려 주었다. 냄새를 못 맡는 것에 대한 후회가 아이를 낳고 나서 밀려왔다

 

지금의 청춘들의 실험실은 어떨까?

꽃가루가 내려앉는 오늘 같은 봄이면그렇게 난 내청춘의 실험실과 스멀스멀 흘러들어오던 라일락 냄새의 기억을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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